어제 하루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날이었습니다. 반대의 상황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알람 없이, 눈을 뜨고,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일상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감기몸살과 찾아온 우울감. 선택에 대한 후회로 갈 길을 잃은 채 나태함과 깊은 수면의 세계로 빠졌습니다.
정신적 빈곤으로 다시 밤일을 해야 하나 싶었으나 면접을 앞두고 접었습니다.
헤어질 결심. 탕웨이의 헤어질 결심은 아니어도, 밤일은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 결심을 단단히 했습니다. 돈 때문에, 아니 불안감에 건강을 저당 잡아서까지 하는 일은 하지 말자고 결심에 결심을 참으로 여러 번 합니다. 그러나 이 정신적 빈곤이라는 난치병으로 결심이 망설임이 됩니다.
그 망설임으로 밤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망설임 때문만은 아닙니다. 최근 2달 정도 밤에 잠을 자니 달라진 게 느껴집니다.
우선, 짜증이 잘 안 납니다. 그리고 몸이 가볍습니다. 새털처럼 가볍다는 것은 아니고, 밤일을 했을 때는 두통과 함께 몸이 참으로 무거웠습니다.
땅이 내 눈 밑으로 올라오는 증상, 충혈된 눈. 밤일을 하지 않으니 사라졌습니다. 밤일을 하는 동안 저는 제 자신이 좀비처럼 느껴졌습니다. 살아는 있는데 죽은 것 같은 느낌. 죽어보지 않았으니 그 느낌이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영혼과 생기가 빠져나간 듯 해 좀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좀비에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음을 하루가 다르게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해가 저물기 전에 집에 들어가 편히 음식을 먹고 널부러져 있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행복합니다.
알람 없이, 통창으로 비추는 햇빛 받으며 눈을 떴을 때도 행복합니다.
어제도 그렇게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역시 쉽지 않아요. 전날 미루어 둔 설거지를 하고 스벅으로 가 책을 읽을 계획이었습니다.
설거지 하기 전 싱크대 주변을 정리하다가 수전을 건드렸습니다. 그런데 뚝! 제 마음도 뚝 떨어졌습니다. 살면서 수전이 두동강 나는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전 처음입니다.
놀라고 화난 마음을 억누르며 설거지를 어떻게 마치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물이 여기저기 분수처럼 내뿜었습니다. 옷도 젓고 영혼도 젓고...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으나 싱크대 아래를 볼 생각을 했습니다. 물이 세더군요. 오후에는 일을 하러 가야 하고 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수도 배관 문제면 더 큰 돈이 나갈 수도 있어 9시가 되자마자 관리실에 전화했습니다. 다행히도 바로 직원분이 와주셨습니다. 더 다행히도 수도 배관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수전은 교체해야 했습니다. 이미 두동강이 났기도 했지만 아래 호수도 문제라고 하는 직원분의 설명.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얼마나 돈을 들지... 관리실에 전화하기 전, 네이버로 수전 셀프 교체를 검색해보니 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직원분이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수전만 사오면 설치는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지옥의 불구덩이 앞에서 떨어질 것 같은 순간, 저를 다시 천국의 문 입구로 이끌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직원분은 어디서 사면 수전을 사면 좋을지도 말씀해주시고 싶으셨으나 친절함에 비해 설명은 반비례. 문득 이마트에서 본 기억이 났습니다.
이마트가 오픈하자 마자 주방 욕실 인테리어 관련 코너로 갔습니다. 역시나 제 기억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종류가 없고 가격이 높아서 놀랐습니다.
아메리칸 스탠다드와 대림바스. 대림바스는 벽에 설치하는 모델이라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아메리칸 스탠다드 모델 2가지가 남았습니다. 가격은 129,000원과 109,000원. 2만 원 저렴해서 마음에 들었지만 디자인이 단순해서 더 마음에 든 109,000원. 0원 소비생활자로서 큰 지출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신세계 상품권. 내돈 하나 안 주고 받은 상품권. 인터넷으로 사면 더 저렴할 수도 있겠지만, 내돈이 나가는 것도 싫었지만 설치해준다는 직원분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빠른 시간 안에 교체하는 것이 더 큰 문제와 고민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고도 1개 밖에 남지 않아 국산인 것 확인하고(중국산 사서 낭패봤다는 네이버 검색시 글 보고) 집어 들어 계산대로 돌진. 상품권으로 결제해서 0원의 슬기로운 소비생활 했다며 또 셀프칭찬.
집까지 걸어오며 다행이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집앞에 이마트가 있어서, 상품권이 있어서, 밤일을 하지 않아서, 아침에 이런 일이 생겨서, 수전도 설치해주는 좋은 관리실이 있는 곳에 살아서...
8시 30분에 일어나 11시까지, 불과 몇 시간 동안 마음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고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결국 직원분이 수전 설치에, 그동안 고민했던 보일러실 문 손잡이도 손 봐주시고 두동강 난 수전과 쓰레기까지 다 치워주시고 갔습니다.
하마터면 출장비와 인건비로 몇 십만 원이 들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다행이고 감사해 홍삼 음료와 커피, 초코렛, 마스크 한 상자 그리고 올리브유세트를 드렸습니다. 직원분은 당연하다며 뭘 이렇게 많이 주냐고 하시면서도 좋아하시며 언제든 문제 생기면 관리실로 연락하라고 하셨습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다 마치고 기분 좋게 출근을 했고 일도 생각보다 잘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생각지도 못한 위메프 2만 포인트로 쿠션 안마기를 내돈 하나 들이지 않고 살 수 있어 행복한 밤이었습니다.
잠들기 전 생각했습니다. 위메프 포인트처럼 30일 내 소멸예정인 인생의 포인트가 있다면 어떨까? 기간이 정해진 삶이라면 하루하루가 지옥일까? 천국일까?
참으로 엉뚱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싱크대 수전 고장에서 몰랐던 위메프 포인트로 쿠션 안마기 0원 결제까지. 유사성이라고는 내돈 0원의 슬기로운 소비생활일 뿐이지만, 하루가 우연과 선택 그리고 사람에 의해 지옥이 될 수도 천국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잔여 또는 소멸예정의 인생 포인트가 있다면, 뭘 하며, 누구를 위해 쓸 수 있을까요? 바로 생각이 안 납니다. 제 인생 포인트가 30일 내 소멸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 지, 지금과 같은 일상을 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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