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의지대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서, 태어나길 잘 했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왜 태어났을까?
기억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언니는 엄마와 아빠의 첫 아이니깐 낳고 싶었을꺼야.
동생은 남자이니깐, 아들이 필요했으니깐 반드시 태어나야 했어.
그런데 나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 언니와 동생만으로도 충분한데.
어렸음에도 나의 필요성과 목적에 대해 속으로 많이 생각했습니다.
입밖으로 끄낸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너 필요없으니 나가라고 할 것 같아서요.
내가 태어나지 않아도 될 아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튀는 행동을 했던 것 같습니다.
동네 수재 소리 듣던 언니를 뛰어 넘지는 못해도 공부 못한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노력은 했습니다.
안 되는 머리로, 다행히도 외우는 걸 잘 했습니다. 수학과 음악 빼고는 노력한 만큼 나왔고 전교 1등도 했습니다.
그러나 명문대는 못 갔습니다. 지방국립대 갔어요. 그나마 국립대라 갈 수 있었고 그때까지는 외우는 걸 잘 해 장학금은 받았습니다. 외우고 쓰는 문과라서요.
어릴 때 몸이 약했던 동생(지금은 그렇지 않아요)을 대신해 장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딸이 아닌 내가 장남이고 동생의 보디가드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생 시키기 전에(부모님이 시키지도 않았지만) 제가 먼저 나서서 힘 쓰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집 보일러 놓을 때 아빠와 제가 돌 때고 모래 날랐죠.
몸 약한 동생은 다칠까봐 제가 먼저 말렸고 놀기 좋아하는 언니는 도망갔고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엄마가 하는 슈퍼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원하는 사관학교도 못가고 절대 안 갈꺼라는 지방국립대 갔으니 얼마나 비참하고 의욕이 없었는지.
그때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서 고등학교 졸업하면 하루 4시간은 슈퍼에서 알바하라는 엄포에 꼼짝도 못하고 일했습니다.
친구도 없고 학교 생활도 싫으니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슈퍼에서 일하는 것이.
우선 새벽에 문 열어 자정 이후 문 닫는 엄마가 불쌍했고, 아빠가 무서워 시작했지만 제가 도움이 되는 자식이라는 게 좋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문제는 언니, 언니는 친구도 많고 학교 생활도 즐거워 매일 늦게 들어오고 슈퍼 일을 돕지를 않았어요. 왜 나만 일하나 피해의식이 생겼습니다. 머리 끄댕이 잡고 자주 싸웠죠.
쪽잠이라도 엄마를 재울 수 있고, 아빠에게 그나마 인정받아 좋았지만 계속 저만 슈퍼에서 일하니 속 터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슈퍼 일 못하겠다고 했다가는 아빠에게 혼날 것 같아 생각한 것이 과외 알바. 당시에 언니가 과외한다고 저녁만 되면 나갔거든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부는 맞고 일부는 거짓말이었지만.
지방국립대 나와서 과외 알바를 구할 수 있을까 자신 없었지만, 서울대 연대 고대 나온 애들은 방학 때나 할 수 있고 계속 아이들을 공부를 봐줄 수 없다는 현실적 상황과 그들보다는 저렴한 과외비용을 마케팅해 생각보다 과외알바가 잘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한달에 백만원도 벌었습니다. 입에 단 내가 날 정도로, 아이들 성적 올리기 위해 자정 넘어서까지 가르치니 엄마들이 소개도 해주고, 성적 오르니 1년은 넘게 가르치는 애들도 생겨 천만 원 넘게 모았습니다.
가끔 후회합니다. 군대 가지 말고 계속 애들 가르치는 것을 해서 학원을 차려볼 껄 하는 후회. 입대 후에도 가끔 연락이 왔어요. 가르치던 애들 엄마한테 다시 가르쳐달라고...그땐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에 넘처 거절했는데 후회합니다.
뭐 후회할 일이 이것만 있겠어요? 후회의 연속이 제 인생인 듯합니다. 어쩌다가 태어났음에도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참으로 욕심도 많고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뭐 열심히 안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마다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이유로 열심히 살지 않나요.
저는 이제는 열심히 살지는 않아요. 디스크라는 불치병도 있고, 욕심 부려서 실패의 경험들이 쌓이다보니 이제는 적당히 삽니다. 나태하기도 하고요. 어쩌다 태어나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습니다.
'storybuc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스로 죽음을 택한 누군가 (2) | 2023.10.11 |
---|---|
바다수영을 하다가 죽는다면 (2) | 2023.10.05 |
문득, 내 제사상에는 어떤 것을 올려야 할까 생각했다. (2) | 2023.09.26 |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은 (0) | 2023.09.13 |
아이셀프, 아이허브 (2) | 2023.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