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맛없다고 생각했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라떼, 카푸치노가 만들어지는 커피 기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따로 카누 아메리카노와 종이컵을 챙겨가야 하는, 열악한 일터. 캡슐커피와 끈적끈적하고 인공적인 향이 강한 아메리카노만 제공되는 커피 기계. 그간 내가 일해왔던 일터의 커피는 라떼가 없었다.
라떼에 목숨은 아니어도 하루, 삶을 의지하는 사람으로서 라떼가 만들어지는 커피 기계를 회사 탕비실에서 만나자 기쁨을 감출 수 없어 혼자 웃었다. 쿠키와 과자들도 있었지만, 이건 다른 일터에서도 수시로 만났고 더 낫지는 않아 감동을 주지는 않았다. 벅찬 가슴을 진정하고 라떼 버튼을 꾹 누르고 지켜봤다.
'맛이 어떨까? 맛있어야 하는데, 제발!'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라떼가 내려지길 기다렸다. 원두 갈리는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인지 내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가 이렇게 라떼 하나에 기뻐하고 감동하는 걸 누군가 눈치챌까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다들 나보다는 월등하고 바쁜 인간들만 있는, 이곳의 유일한 실패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음, 아!' 아니었다. 내가 기대했던 라떼가 아니었다. 사람의 손을 거쳐 나오는 기계에서 나오는 라떼여도 이렇게 맛이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다시 한 모금, 역시나였다.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로스, 카푸치노는 다르지 않을까 연거푸 내려봤으나 모두 형편없기는 마찬가지.
'대기업도 별 수 없구나' 형편 없는 커피를 마시고 나는 회사를 탓했다. 커피를 마시기 전에는 분명 '이게 웬 횡재인가! 라떼와 카푸치노까지 만들어주는 커피 기계가 있다니! 정말 대기업은 다르구나' 감탄했던 나는 돌변했다. 주말에 일했던 전기바이크 사무실과 평일 야간에 일했던 대리운전 사무실의 커피가 생각났다. 둘 다 커피 기계가 드롱기였고 원두도 제법 좋은 걸 공수했다.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만 제공되었지만 커피를 내리는 동안은 향에 취해, 내리고 난 후에는 그 맛에 행복했다. 두 곳 모두 좋은 커피가 최소한의 좋은 복지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좋은 커피를 주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근무환경 등 여러 요소들 때문에 결국에는 관두게 되었다는 것. 대리운전 회사는 함께 일하는 관리자가 불평 불만과 짜증으로 시작해서 끝나서, 전기바이크 회사는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일하는 것과 잦은 고장으로 도저히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아서 관뒀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커피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힘들고 짜증날 때마다 커피를 마시며 참았고 위로 받았다.
형편 없는 회사 커피를 마시고 난 후,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파견직어도 대기업에서 일은 해보고 싶어 입사한 회사, 내가 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단순하고 분명했다. 팀 관련 전화를 받고 이에 대해 답하는 일. 내가 오기 전에는 팀내 직원들이 순차적으로 돌아가면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존재감이 없는 일인데 왜 굳이 사람을 채용했을까?
일하는 회사명을 밝힐 수도 없고 밝히고 싶은 마음도 없기에 간략히 말하면, 주식회사의 주인인 주주들의 불만이 높아 그들의 민원 전화가 회사 벽을 타고 넘어올 지경에 이르러 팀원들 고유의 업무 진행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2주간의 오리엔테이션 기간 동안 녹취를 들어보니 팀원들의 고충이 느껴졌다.
전화량은 많지 않았으나 한 번 전화가 들어오면 20분이 넘었다. 목숨보다 귀한 돈으로 산 주식이 목숨값보다 못해진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불만 불평, 빈정과 욕설. 6년 이상 콜센터에서 밥벌이 했던 나에게는 애교 수준이었다. 그러나 콜센터 경험도 없고 그런 일을 하려고 이 회사에 들어온 것이 아닌 팀원들에게는 치욕적이고 울음 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팀원들의 학력과 경력을 문서나 글로 확인한 것은 아니나 그들의 대화 속에서 흔히 말하는 스카이 출신 또는 해외 유학과 근무 경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굴도 모른채 전화로 짜증과 불만, 조소와 욕을 듣고 나면 그 이후의 시간들을 버티기가 힘들다. 팀원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분야 투자 관련 정보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고유의 업무가 있는데 민원 전화를 받고 응대하기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많이 힘들었는지 내가 입사하고 2주간의 오리엔테이션 기간에는 시스템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내가 전화를 받자 팀원들은 자주 내게 고맙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응대하는, 대단하지 않은 이 일에 대해 팀원들은 큰 스트레스를 느꼈다고 한다.
전화 받고 하는 일로 밥법이 하고,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콜센터에서 쌓은 내공으로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회사의 정보가 대외비이기에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기도 하고, 불평 불만과 질문들도 거의 비슷했다. 욕설과 과도한 요청사항은 업무 방해로 차단할 수 있어 콜센터처럼 당하고만 있지도 않았다. 전화도 하루에 1 ~ 3통, 이마저도 최근에는 없다.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회사 관련 좋은 뉴스가 이전보다는 잘 나오고 있고 주식도 올라서이지 않나 싶다.
5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회사 커피는 여전히 맛없지만 나는 출근할 때마다 라떼 마실 생각을 한다. 어느새 적응이 되었다. 전화가 오지 않는 이상은 할 일이 없는, 말 할 일이 없는 분명한 내 업무. 그에 비해 팀원들은 각자, 때로는 유기적으로 업무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형편 없는 라떼, 반으로 줄어든 형편 없는 소득. 내돈을 지불해서라도 맛있는 라떼를 마시고 줄어든 소득을 채우기 위한 알바 찾기는 몇 번의 시도 끝에 멈추웠다. 그 어느 때보다 나태한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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