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증이 있다. 이렇게 폭식증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말 할 수 있을지 몰랐다. 먹는 것과 토하는 것이 쌍을 지어 내 의식을 지배했던, 심한 때가 있었다. 비밀이었다. 절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창피한 일이었다.지금은 창피하다기 보다는 마음의 병, 욕심이 많은 나의 단점이라 생각하며 다스리고 있다.
초등학교까지는 비교적 날씬한, 다리가 이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고 팔다리가 긴 편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 후, 넘치는 식욕을 공부를 핑계로 마음껏 채웠다. 이렇게 공부로 성공도 못할 것을 알았다면 식욕을 참으며 외모를 가꾸었을까 싶다만, 중학교 3년간 삼시 세끼는 물론이요 점심 먹고 간식, 하교길 간식까지 챙겨 먹었다. 집이 넉넉하지 않아 햄버거, 치킨, 피자는 먹지 못했고 간장밥, 라면, 과자, 떡복이, 튀김, 붕어빵, 호떡을 참으로 열심히 먹었다. 부모님 둘 다 성실히, 특히 엄마는 힘들게 일 하셨고 살림까지 하셨기에 못 먹고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난 항상 배고팠다. 공부를 못 했다면 아마도 부모님 꾸중이 심했을텐데 그렇지는 않았다. 항상 그만 먹으라고는 하셨지만. 많이 먹어서 일년에 한 번씩은 체해서 병원에 갔고 그때 배가 일시적으로 들어갈 뿐 거의 대부분 나의 배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전부 먹는 게 키로 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살도 더 갔다. 키도 크고 몸무게는 더 크니 결국 비만이 되었다. 그래도 살 뺄 생각은 안 했다. 무슨 자신감인지 공부하는 학생이 무슨 다이어트야, 다이어트는 나중에 하며 되잖아 하며 청바지 34인치와 100 사이즈 티셔츠를 입고 수학여행을 가서도 김밥 먹느라 정신 없었다.
중학교 3년의 몸무게 급성장으로 살이 트고 턱이 2개가 되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느 겨울 날, 목욕탕에서 몸무게를 재보려 저울에 올라간 순간 앞자리에 8이 뜨는 걸 보고 놀라 바로 내려왔다. 아빠는 항상 밥 한 공기도 모자라 두 공기를 먹는 날 보며 그러셨다. '여자애가 몸무게 80 넘으면 돼지야. 너 그렇게 되고 싶어!'
설마 했는데 난 돼지가 되었던 것이다. 정신 차려야 했지만 이미 돼지가 되어버린 몸을 움직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 차고, 운동 조금이라도 하고 나면 배고파서 더 먹고. 동생이 누나 웃을 때 코가 보이지 않는다고 놀려도 내 몸은 더 비대해졌다. 그러다가 드디어 때가 왔다. 산중턱에 있던 나의 모교, 어느 여름 날 숨이 차서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허벅지 쓸림. 숨을 고르며 아직 도착하지 못한 학교를 올려다보며 이러다가는 죽겠구나 싶었다. 허벅지가 터져서 죽겠구나 싶었다.
그 날 이후 밥을 먹지 않았다. 매점도 가지 않았다. 오이와 당근만 먹었다. 한달 그렇게 하니 교복 치마가 한바퀴 돌아갔다. 숨이 차지 않아 중간에 멈추지 않고 학교 언덕을 올랐다. 허벅지에 상처가 사라졌다. 몸무게를 재봤다. 67. 앞자리 8이 사라졌다. 나의 첫 다이어트는 그렇게 성공했다. 그러나 매일 오이와 당근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다시 라면과 밥을 먹기 시작하니 살이 금새 올랐다. 운동을 해야 했다. 사관학교라는 목표도 생겨 체력도 길러야 했다. 야간자율학습이라 쓰고 야간강제학습으로 밤 12시가 되야 집에 오니 운동할 시간이 없었지만 저녁을 거르고 학교 운동장을 걷거나 뛰었다. 60, 내 고등학교 최저 몸무게이다. 그 밑으로는 내려가지 못했지만 엄마가 옷가게 가서 창피해하지 않고 옷을 사줄 수 있었고 그만 먹으라는 아빠의 잔소리도 멈추었다.
살도 빠지고 사관학교 입시에도 성공했으면 좋으려만 그렇지 못했다. 몸무게 앞자리가 8에서 6으로 바뀌고 뚱뚱하다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입시 실패자가 되어 그토록 무시하던 지방 국립대에 갔다. 대학 4년, 방황했지만 적당히 성적 받고 장학금 받았다. 과외로 내돈이 생기자 식욕이 부응했고 먹고 싶은 거 사 먹는 재미로 사니 다시 체중이 늘었다. 한창 꾸미고 예쁘고 싶은 마음도 있어 수시로 다이어트도 했지만 워낙 먹는 게 많아 요요의 반복. 그러다가 대학 3학년때 사관후보생으로 장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체력 기르기. 이때 과외 다니면서 자전거 타기와 걷기를 하니 군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55, 내 대학시절 최저 몸무게. 그러나 하체가 튼튼하고 어깨가 있어 55사이즈는 입지 못하고 66을 입었다. 이게 자존심이 상해 55사이즈 입는게 소원이었던 시절이었다.
키 165, 몸무게 58. 해군사관후보생과 여군사관후보생(50기 이후 여군 따로 뽑지 않고 남군과 통합한 육군 장교 시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신체검사때 측정한 키와 몸무게. 몸무게 60이 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영도 하고 달리기도 했지만 이때는 워낙 먹는 것이 많아 체중이 쉽게 줄지는 않았다.
달리기와 윗몸일으키기에서 특급을 받고 해군과 여군 모두 사관후보생 시험에서 최종 합격했다. 난 입교가 빠른 해군에 입대했다. 다시 태어나도 받고 싶지 않은 군사 훈련, 육체적 정신적으로 사람을 밑바닥으로 가게 만드는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난 마른 사람이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말라 봤다. 훈련 중 외박을 나가 집에 가니 평소 입던 옷들을 입으니 아이가 어른 옷 입은 것처럼 컸다. 55 사이즈 입는 게 소원이었던 내가 옷가게에서 55 사이즈가 크다고 했다. 짜릿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함께 먹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었다. 거식까지는 아니어도 먹는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먹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훈련을 마치고 임관해서 더 해졌다. 나의 첫 부임지는 사령부로 내가 첫 여군이었고 혼자였다. 그래서 여자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남자 화장실 한 칸을 사용하라고 만들어 주었다. 당시에는 남자들이 화장실에서 담배도 피웠다. 담배 냄새도 싫었지만 화장실 가장 끝칸을 사용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는 동안 마주칠 남자들. 그게 싫어 본관이 아닌 후생관의 여자 화자실을 사용했다. 걸어서 10분 거리. 차로를 건너 가야 하는. 가는 길이 멀지는 않으나 이목이 집중되었다. 차도 다니고 사람도 다니고. 몇달간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물도 안 마시며 버텼다. 소변 마려우면 화장실 가야 하니. 이런 상황에서 뭘 먹을 수 있었을까? 화장실도 문제지만 뜻하지 않게 여러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입에 오르 내리니 나의 외모, 체중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체형을 놓고 농담을 주고 받는 남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그들의 농담꺼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뚱뚱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먹는 것에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람은 결국 배고프기 마련이다. 퇴근해서 숙소에 홀로 남게 되는 순간, 배고픔은 나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정신 차려 보면 내 눈앞에는 흔적만 남아있다.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흔적들과 터질 것 같은, 산처럼 올라온 나의 배. 그제야 정신이 들고 다음날 군복이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며 화장실로 급히 간다. 변기를 가득 채운 토사물과 꺼진 나의 배를 보며 안심한다. 그렇게 나의 폭식증은 시작되었다.
새벽 6시 출근, 오후 6시 퇴근, 퇴근후 폭식과 구토. 부끄럽게도 하루 일과를 이렇게 보냈다. 주말 당직이 없을 때는 죄의식에 하루종일 달렸다. 새벽 6시에 나가서 오후 6시에 들어왔다. 발톱이 빠졌다. 빠진 발톱을 보며 다시 태어나겠다 다짐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시 반복되는 일상. 회식과 술자리가 있는 날은 더 했다. 내가 이렇게 엉망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밝은 척하며 음식과 술을 과학게 먹었다. 많이 먹어도 날씬하다는 이야기에 안심했다. 마라톤도 나가고, 체력검진 달리기에서는 남군들 제치고 1등으로 들어왔다. 업무능력과 체력에서 남군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고 싶은 자존심이었다.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는 먹는 것으로 자학했다. 다행히도 근무지가 바뀌며 부모님댁으로 들어가게 되며 폭식증은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체중에 대한 압박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때 하던 일이 퇴역한 장성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고 이를 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대 밖, 흔히 말하는 사회로 나가는 일이 많게 되었다.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는 일도 종종 생겼고, 사회 사람들을 만나니 외모에 신경이 쓰이게 되었다. 나 자신을 가꾸고 싶다는 욕심이 강해졌다. 얼굴은 성형을 하지 않는 한 드라마틱하게 변할 수 없으나 몸은 다이어트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간 몸소 겪었기에 적게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1일 1식에, 점심시간에는 부대안 헬스장에서 트레드밀을 달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2시간 이상의 자전거타기와 달리기. 어느 정도 음식에 대한 자제력을 갖게 되고 다시 건강한 나를 찾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복무 심사에서 탈락하며 다시 나의 몸과 마음은 무너졌다. 너무나 쉽게. 내가 그렇게 열심히, 나 자신을 해하며 군에 충성하고 있는데 날 배신하다니...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나는 장기복무에 대한 꿈은 완전히 접었다. 군에 입대할 때, 꼭 장기복무에 성공해서 군인으로, 장교로 끝까지 남고 싶었다. 장교가 되기까지 다른 꿈은 꾸지 않았는데, 군이 날 버렸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탈영하고 싶은 마음으로 남은 군생활을 보냈다. 무너진 마음에 다시 폭식증이 왔다. 다행인 건, 간헐적 폭식증. 한달 정신 못차리고 먹고 통하다가 다시 정신 차리기.
전역 후에는 사회에서 다시 살아남기 위해 돈 아끼며 살다보니 폭식증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주거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사회에서 먹는 것도 아껴야 내 집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 나와서는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가 나를 지배했다. 그렇다고 체중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사회에 이쁜 여자들이 많으니 성형수술 들여가며 얼굴을 고칠 수 없어 체중에 더 신경을 썼다.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를 향해 덜 먹고 교통비를 줄이기 위해 걸어다니다 보니 저절로 살이 빠졌다. 더 이상 55사이즈 입기가 소원이 아니었다. 44사이즈에 내 몸을 우겨 넣으며 여유가 생길 날을 그리며 먹는 것을 참고 걸었다. 힘든 연애로 마음 고생까지 겹쳐 43이라는, 다시는 못 만날 인생 최저 몸무게를 만났다. 딱 맞던 청바지 26인치가 헐렁해져 줄줄 내려 와 24인치를 사기 위해 여러 매장을 돌며 행복해했다. 24인치 청바지를 탈의실에서 갈아 입고 나온 날 보며 점원들은 하나같이 '정말 마르셨다. 개미 허리네요. 24인치가 맞다니 놀랍다' 라고 했다. 황홀했다. 밥을 안 먹어도 고프지가 않으니 살은 더 빠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다이어트는 내게 숙제가 아니었다. 옷 사이즈와 스타일, 브랜드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마르면 확실히 뭘 입어도 괜찮아 보인다. 왜 디자이너들이 그토록 마른 모델을 원하는지 이해간다.
그러나 사람은 안 먹고 살 수 없는 법. 잘 참다가도 왜 밤만 되면,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되면 배가 고플까? 사람이 아닌 굶주린 하이에나로 변하는가?
아파트는 아니어도 작은 내 집을 장만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13평 투룸 구옥 빌라. 그러나 대출 없이 산 내 집이었다. 내 모든 자산을 들인 집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때 대출도 끼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아파트나 더 나은 조건의 집을 샀어야 하나 싶지만, 대출 껴서 신축 아파트도 사 보고, 대출 껴서 오피스텔도 사 본 경험자로서 대출은 마음의 감옥과 같은 것. 갚아야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감옥.
내 집 장만하고 다시 여유가 생기니 돈 아끼려고 먹는 것 참았던 때보다 훨씬 나아졌다. 옷에 관심은 있으나 빈티지 쇼핑몰과 남대문 시장에서 몇 천원 옷으로 충분히 만족했고 차도 없으니 결국, 돈 모으기 위해 참았던 먹는 것에 돈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 이제는 먹고 싶은 거 먹자하며 자유로워졌다. 당연히 먹는 양이 늘어나니 몸무게 앞자리는 다시 5로 갔다. 그래도 매일 걷고 등산과 수영도 적절히 하니 괜찮았다. 24인치 청바지가 끼어 짜증은 났지만 내 집에, 3천만 원 정기예금에, 주식 수익으로 천 만 원 넘게 벌고, 이름 모를 공공기관 정규직으로 이직까지 해 걱정이 없으니 그 어느 때보다 몸과 마음이 자유로웠다. 폭식증은 이제 더 이상 나의 고민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식으로 돈 맛을 보고 난 이후, 주식 단타를 하며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다시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시작했다. 먹고 토하고 다시 운동하고. 단타로 수익을 내서 행복하다가도, 매도후 급등하는 주가를 보며 후회와 자학으로 하루하루가 감정의 롤러코스터. 그 롤러코스터를 타며 결국 먹는 것 외엔 날 진정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먹고 나면 터질 것 같은 배와 금방이라도 돼지로 변할 것 같은 나의 몸을 보며 토하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먹고 토해야 잠이 오는 이상한 습관이 생겨 버렸다.
결국 탈수 증상으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경험과 구토로 상처로 얼룩진 오른손을 보며 결심했다. 더 이상 먹는 것으로 내 자신에게 장난치지 않기로. 결심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닌지라 이후에도 먹고 토하기도 했지만, 그 횟수가 점차 줄어 들었다. 주식 단타를 더 했다가는 내 인생이 상장폐지될 것 같아 주식도 멈췄다. 대신에 장기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 신축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입주까지 3년 6개월. 정기예금과 주식으로 번 목돈이 1억 정도 되는데 이걸 그냥 두었다가는 또 단타를 할 것 같은 나의 손모가지를 믿을 수 없없다. 중도금 무이자라는 파격적인 조건. 입주까지 중도금을 부지런히 모으면 되지 않는가 하는 단순하지만 현명한 선택이라고 본다.(급등을 앞두고 매도한 것은 경제적 자유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세상 가장 멍청한 선택을 했지만) 결국 계획대로 입주했다. 그러나 살던, 내 첫 집이 팔리지 않아 1억 정도를 대출 받아 입주의 기쁨과 행복을 오롯이 즐긴 건 한달 정도였지만.
나의 숨기고 싶은 비밀, 폭식증에 대한 여정이 이리도 길지는 몰랐다. 먹고 토하는 것의 단순 반복이라고 생각했고 현재는 심하지 않으니 간단히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폭식증은 아직 유효하며 내 삶의 그림자다.
삶의 목표와 그 과정에서 나는 먹는 것과 내 몸에 집착해왔다. 왜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리고, 긍정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는가 후회하고 있다. 후회하고 있고 무엇이 나에게 나은 것인지 알고 있음에도 나는 먹고 토한다. 그것이 매우 간헐적이고 대부분은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하나 폭식증은 여전하다. 생각해보니, 어려운 일들을 해냈으나 다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방치할 때 다시 찾아오는 것 같다. 먹는 것으로 위로받고 다시 토하는 것으로 안심하는 내가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반성하고 그렇지 않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예전의 나라면, 폭식증으로 매일을 살던 나라면, 몽쉘통통 하나 아니 한통을 먹고 나서 돼지가 될까봐 무서워하며 바로 화장실로 갔을텐데 지금은 그정도는 아니다. 몽쉘통통 한입, 그리고 라떼를 마시며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 먹고 싶은 건 결국에 먹기 마련이니 참지 말고 먹자. 그래야 적당히 먹고 만족할 수 있으니.
너무 멀리 보지 말자. 지금의 내가 별로여도 언제가는 괜찮게 될 수도 있으니 지금의 작은 행복을 참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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