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미어, cash~mere. 이름에 캐시가 들어갈 정도의 고급진 이름. 산양에서 빠진 털로 짠 고급 모직물이라고 한다. 가성비 제대로 하는 유니클로 덕에 캐시미어는 더 이상 고가의 제품은 아니다. 그래서 나도 몇 번 사봤다. 만족했을까? 그렇지 않다. 매번 실패했다. 빈티지 랄프로렌 청록색 캐시미어 니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빈티지를 좋아한다.너무나 애정해 장사까지 했다. 장사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건물주 좋은 일만 하고 실패했다. 장사를 접으면서 다시는 빈티지, 구제는 쳐다보지 않으리라 했지만 여전히 빈티지를 좋아한다. 몇 번의 이사로 옷이 큰 짐이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 옷을 계절마다 정리한다. 새 것도 있지만 갖고 있는 옷의 대부분이 빈티지, 구제다. 남대문시장의 리어카 옷무덤에서 건진 옷부터 빈티지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입한 옷까지. 비싸봐야 만 원이다. 그래서 죄책감 없이 포기할 수 있다. 버리는 것은 아니다. 헌옷 수거 업체에 판다. 팔아봤자 몇 천 원이지만, 버리지 않는다는 죄의식을 없게 한다. 헌옷삼촌을 이용하다가 수거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지역으로 이동하며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헌옷 수거가 안 되자 옷을 포기하는 것이 아까웠다. 그리고 빈티지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고 날 빈티나게, 오래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아 새옷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주머니 사정이 뻔하고 눈높이는 백화점에 있으니 새옷을 사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특이한 나의 취향도 영향이 있어 흔히 말하는 요즘 트렌드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했다. 덕분에 나의 옷장은 여유공간이 많아졌다. 가득 채운 옷장과 서랍장을 보고 부자가 된 착각에서 벗어났다. 나이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몇 번의 과한 시도 끝에 내게 어울리는 스타일과 그렇지 않은 스타일을 잘 알게 되어 모험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러 번의 정리 끝에 살아남은 아이들은 빈티지, 구제옷이다. 분명 새옷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샀고 오랜 세월을 보냈음에도 날 편안하게 하고, 때로는 날 빛나게 해주는 건 빈티지. 그래서 다시 빈티지로 돌아갔다.
빈티지 쇼핑이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불한 돈이 미안할만큼 질이 너무 좋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취향, 체형을 고려해 빈티지 쇼핑에 대한 원칙이 있다.
첫번째 원칙은 소재다. 울과 실크, 가능하면 울과 실크 100%의 제품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피부에 닿았을 때 가장 부드럽고 편안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낸다. 반면에 면은 시간에 약하다. 변색과 구김이 있기 때문에 면은 100%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두번째 원칙은 사이즈다. 다이어트에 목숨 걸었던 시절에는 무조건 작은 사이즈를 사서 몸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몸을 맞춰 살을 빼거나 구겨 넣어도 내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사이즈가 있다. 그래서 옷에 부착된 라벨이 아닌 실측 사이즈를 믿어야 한다.
상의를 고를 때는 어깨의 실측 사이즈를 꼭 확인한다. 왜냐햐면 어깨가 넓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소재와 디자인을 갖춰도 내 몸에 맞지 않아 불편하고 결국에는 입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의를 고를 때는 상의보다 고려할 요소가 많다. 우선, 길이를 확인한다. 종아리가 쭉 뻗은 체형이 아니기 때문에 좋아리를 가리되 얇은 발목이 부각될 수 있는 길이, 92 ~ 98cm가 단화를 신어도 바지끝이 바닥에 닿지 않고 편안한 길이감이다. 100 ~ 105cm도 괜찮지만, 신발을 신경써야 한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잘록한 편이라 해당 사이즈도 반드시 확인한다. 넓은 어깨가 걸리지 않으면서 올라온 승모근을 덜 부각하게 할 수 있는 레글런를 선호한다. 레글런이 아니라면 36 ~ 40cm 어깨 사이즈가 편안하다. 어깨 패드가 없다면 40 ~ 43cm도 괜찮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된다. 넓은 어깨가 더 넓어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허리와 엉덩이는 얇은 편이다. 내가 나름 자부심을 갖는 신체다. 허리는 64 ~ 66cm를 선호한다. 많이 먹으면 앉아 있을 때 압박을 느끼지만 적당히 먹게 하는 효과가 있는 사이즈다. 하루 종일 숨 들이 마시고 안 먹을 각오하면 60cm도 입을 수 있고 입어도 봤다. 그러나 그 사이즈 옷들은 결국 다 버리게 되었다. 입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요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엉덩이는 89 ~ 92cm가 적당하다. 바지 엉덩이 부분이 축 쳐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해당 사이즈를 선호한다.
세번째 원칙은 가격이다. 만 원까지다.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이고, 입어봐서 아닐 때는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가격이다. 아무리 내 취향이고 소재가 좋아도 초과해서 사고 싶지 않다. 내 능력치보다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산 옷은 나와 맞지 않아도, 날 불편하게 해도 그 돈 때문에 아까워서 포기하지를 못하고 결국은 스트레스가 된다. 옷은 입은 자가 편해야 하고 빛나게 해줘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를 줬든 말이다.
겨울이 오기 전, 질 좋고 저렴한 니트 하나를 마련하고 싶었다. 가볍고 따뜻하며 피부에 바로 닿아도 부드러운, 결국 떠오른 것은 캐시미어. 그러나 매번 실패했고 헌옷삼촌 양도 혹은 쓰레기가 되었기에 제외하기로 했다. 즐겨 찾는 빈티지 온라인 쇼핑몰 몇 곳을 둘러봤다. 장바구니까지 담고 결제까지는 이어지지는 않았다. 비슷한 소재와 디자인의 니트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게 없는 것은 캐시미어. 실패했음에도 좋은 캐시미어 니트 하나는 갖고 싶다. 즐겨 찾는 빈티지 온라인 쇼핑몰 코코로코에서 문자가 왔다. 50% 세일. 안 볼 수가 없다. 코코로코는 타미힐피거, 라코스테, 폴로 등 브랜드 제품 빈티지를 판매하는 쇼핑몰이다. 세일 전 가격은 내가 지불할 수 있는 최대치를 초과해 눈으로만 즐기고 사지는 않는다. 그런데 50% 세일을 하면 지불할 수 있는 가격이다.
진한 카키색의 랄프로렌 니트. 목 한쪽으로 양가죽으로 된 단추가 달려 있고 목까지 감싸는, 약간 특이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소재를 보니 울 80%와 캐시미어 20%. 이렇게 캐시미어 함량이 많은 제품은 입어본 적이 없어 감이 오지 않는다. 어깨 실측 사이즈도 괜찮다. 가격은 만 원. 사이즈와 가격 모두 내 빈티지 쇼핑 원칙에 맞다. 다만 캐시미어 함량은 경험치가 없어 모험이다. 한달간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샀다. 그때까지 안 팔린 것이 나와의 인연이라 믿으며.
지난주 토요일부터 칼바람이 불며 춥다. 케시미어가 생각났고 내게는 빈티지 랄프로렌 니트가 있지 않은가. 드디어 입었다. 맨살에 입었음에도 전혀 따갑지가 않고 부드럽다. 스카프처럼 가볍다. 단추를 끝까지 잠그니 목이 따뜻하다. 성공한 것 같다. 그럼 이전에 샀던, 실패작 캐시미어는 뭐가 문제였을까? 함량. 다 5%의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걸 이제야 느낀 것이다. 캐시미어 20%를 입어보고야 알게 된 것이다.
다시는 안 사겠다던 캐시미어는 이제 나의 애정이 되었다. 무거워서 입기 싫은, 그러나 단정해 보여서 입게 되는 검정색 롱코트를 버리고 캐시미어 롱코트를 사고 싶다. 캐시미어 20% 이상의, 어깨 사이즈가 맞고, 만 원 이하인 롱코트. 생각만해도 설렌다. 지난주 토요일, 광화문광장에서 칼바람 맞으면 번 8만 5천 원이 입금되면 사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되었다.
캐시미어 20%처럼, 팍팍한 삶을 부드럽게 해 줄 20%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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