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에 깨어보니 새벽 1시 54분. 꽤 오래 잤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이 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동생이 그러더군요.
'누나, 자다가 깼는데 아직 새벽이면 좋지 않아? 아직 더 잘 수 있는 시간이 많으니깐'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이었던 동생은 아이가 태어나자, 밤 10시면 골아 떨어집니다. 퇴근해서 아이 목욕시키고 밥 먹이고, 같이 놀아주다 보면 어느새 자고 있다고 합니다. 조카랑 2시간만 놀아도 다음날 거의 누워 있는 저로서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렇게 잠들면 보통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바쁜데, 자다가 깨었는데 아직 새벽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동생 말에 웃음이 나면서도 아직은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작년부터 지난 달까지 2~3개의 일을 하며 목돈을 모으고 나니 많이 나태해져 지금은 평일 오전에는 간헐적 알바를 하고, 정기적으로는 평일 오후 4시간만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달은 아니었지만, 400만 원에서 600만 원을 벌었습니다. 숨만 쉬어도 필요한 생활비 100만 원, 적금과 보험으로 100만 원. 대출이자는 임대소득으로 충당하니 매달 최소 200만 원은 모을 수 있었습니다. 웰컴저축은행 정기예금이 3개월 단기간이어도 5.3%의 높은 금리를 줘서 매달 200만 원 이상을 3개월 정기예금으로 가입했습니다. 금리 변동이 심한 시기라 더 높은 금리가 나오면 갈아탈 목적으로 말이죠. 일을 많이 하게 되면 돈이 금방 모아져 좋습니다.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돈 쓸 시간도 별로 없어 더 좋습니다.
별다른, 특별난 재주가 없는 저는 저의 몸과 시간을 갈아 넣어 일했습니다. 노동량과 노동시간이 많으니 그만큼 비례해서 돈이 들어왔습니다. 들어온 돈은 최소한만 쓰고 최대한 모았습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대출금을 하루라도 빨리 상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적금 금리보다 더 빠르게 오르고 있는 게 대출금리입니다. 임대소득으로 대출이자를 충당하고 있으나, 원금이 남아 있습니다. 재작년 12월에 한시적으로 제가 대출을 이용한 농협에서 중도상환수수료를 면제해줘 1억 이상을 상환했지만 아직 7500만 원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게 저의 머리와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깊이 새겨지고 박혀 있습니다. 빨리 떼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모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에는 농협에서 중도상환수수료를 면제해주는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수수료를 내고 모은 돈으로 일부 원금을 상환할까 쉼없이 고민했지만, 현금을 보유하자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3000만 원 이상의 현금을 갖고 있으니 게으름이 찾아왔고, 몸과 마음 모두 휴식을 원하나 숨만 쉬어도 나갈 돈이 100만 원 조금 넘습니다. 저축과 보험은 지난 달까지도 주말에 일을 했고, 아직까지는 계속 할 지 결정하지 못한 일로 소득이 발생되어 '매월 200만 원 정기예금 가입'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달은 그 어느 때보다 일하는 시간이 적습니다. 믿을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더 이상은 제가 안 된다는 것을, 노동량과 노동시간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과 행동에 대한 후회가 큰 것 같습니다.
자다 깼는데 아직 새벽이라 더 잘 수 있어 좋다는 동생의 말, 저는 새벽이 빨리 지나 아침이 오길 바라던 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간절히 바랬죠. 그래야 집에 갈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으니까요. 밤에 잠을 자고, 새벽에 눈을 떠서 다시 잠 들고, 아침의 해를 집에서 맞이할 수 있는 지금 참으로 행복합니다.
저는 아침형 인간이라기 보다는 '해 지면 집에 들어가서 씻고 밥 먹고 9시면 잠 드는' 초저녁형 취침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야자를 해야 했던 저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기에 새벽 2시에 잠들기도 했습니다. 대학 때는 과외로 돈 번다고 자정까지 잠 못 자며 애들 가르쳤습니다. 군에 가서는 좀 편해지나 했는데 더 하더군요. 국방의 의무가 없는데도 하겠다고 스스로 갔으니 책임져야 하지만, 날밤 세우는 당직 서고 비번 나가지도 못하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질려 전역했습니다.
전역 후에는, 다행히도 밤에 잠은 자며 일했습니다. 이때는 아침형 인간으로 오전 8시 전에 출근해 일을 했고 오후 6시 되면 칼퇴했습니다. 오후 5시만 되면 눈이 풀렸으니 회식도 거부하는 대단한 인간이었습니다. 건설회사 직원으로 이라크 가서도 새벽 3시면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오전 8시 전에 출근했습니다. 사실 이때는 제 자의이기 보다는 그곳의 일과가 오전 8시에 시작했고 창살 없는 감옥에 가까워 건설현장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니 오후 5시에서 6시에 퇴근하고 나면 밥도 안 먹고 자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아침형 인간이었으나 날밤도 세우는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운좋게 공공기관 경력직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과장 직함도 달아주고 정규직이어서 운 좋다고 생각했는데, 입사후 첫날 알았습니다. 운 참 없다는 것을. 말이 좋아 과장이지, 제 아래 아무도 없습니다. 홍보과장인데 정보화와 정보관리, 대표이사 비서 겸직까지 시키는 대단한 조직이었습니다. 분기마다 잡지도 만들었습니다. 그걸 저 혼자 다 했습니다. 그러니 밤도 세우고 해 뜨기 전에 출근했습니다. 그래도 일이 끝나지 않는 조직었습니다. 결국 1년 일하고 나왔습니다. 그 이후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 3개월 정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참 이때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저라는 인간은 명랑합니다. 안 오는 잠 굳이 자려고 노력하지 말고, 차라리 이 시간에 일을 하자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지쳐서 잠들겠지' 하며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하나만 시작한 게 아니라, 주간에는 일반 회사에 다니고 퇴근해서는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스크린골프장, 남대문 야간도매시장, 주차관제센터 등에서 저녁과 새벽에 일을 했습니다. 이 때의 알바 이야기도 나중에 길게 얘기하겠습니다. 제 생각대로 일이 끝나면 잠자기 바빴습니다. 때로는 씻지도 못하고 잤습니다.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잠 못 이룬 밤은 일을 하며 고통을 잊게 했습니다. 물론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의 고통을 잊게 해줬습니다. 거기에 돈까지 버니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아파트를 분양받으며 본격적으로 밤일 근무자가 되었습니다.
사람 보다는 돈을 믿었던 때, 돈만이 나에게 남는다는 신념을 갖게 된 저는 서울은 아니어도, 아파트에 그것도 새 아파트에 살아보자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계기는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당시에도 저는 자가에서 살았습니다. 이라크 다녀와서 주식으로 번 돈으로 서울 어느 모처에 집을 사서 살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낡고 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에 살았습니다. 계단으로 다니면 되지 하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제가 급성 디스크로 응급실에 실려가며, 뼈저리게 새겨졌습니다. 엘리베이터 없는 집에 산다는게 이리도 불편하고 창피하다는 것을요.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저를 옮기기 위해 애를 썼던 119대원분들. 아픈 고통보다는 창피함의 고통에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반드시 아파트에, 새 아파트에 살겠다, 지하주차장부터 엘리베이터를 타면 바로 갈 수 있는 아파트에 살겠다는 욕심과 의지가 생겼습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돈을 벌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하다 보니 낮과 밤 모두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결심을 하던 때, 저는 주말과 공휴일에는 차량 단말기 관련 고객센터에서 전화상담사로 일했습니다. 다른 업무보다는 유사한 일을 해서 적응하는 시간과 노력을 줄이자며 고객센터 심야 전화상담사 구인 공고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주말에 하는 일도 유지해야 하기에 평일 심야 시간대를 찾다보니 배달어플 고객센터의 구인 공고를 보게 되었고 근무시간이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다음날 새벽 4시 30분인 걸 보고 지원했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못한채 오로지 근무시간만 그리고 교육 5일이면 충분히 응대 가능한 단순 업무라는 문구에 말이죠. 면접 가보니, 지원자가 많았습니다. 특히, 제가 지원한 심야는 단 2명 뽑는데 지원자가 가장 많았습니다. '이유가 뭐든 밤에도 일해야 할 정도로 절실한가? 아니면 독한 것인가? ' 생각하며 면접을 봤고 제가 선택되었습니다. 교육을 받아보니 정말 단순했습니다. 주말 직장은 전산도 복잡했고 확인할 것이 많았는데 구글에 접속해서 주문 확인하고 이력 남기면 되는 정도니 얼마나 쉽습니까? 문제는 영어로 되어 있어서, 이것 때문에 중도 이탈자도 꽤 있었습니다. 저는 영어는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고객과 라이더, 업체 사장님. 즉 제가 응대해야 할 사람들이 문제였습니다. 살면서 그때 욕은 다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배달어플을 보면 이렇게 읽습니다. 욕~이요!
그곳에서 일하면 만났던 고객과 라이더, 업체 사장님들이 모두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의 바르고, 충분히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배려를 잊지 않으시는 고객분들도 있었고, 배달거지라고 하는 먹튀 고객 때문에 배달비도 못 받는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라이더분들, 욕~이요의 갑질에 가까운 수수료 정책과 패널티에도 배달어플을 이용할 수 밖에는 없는 슬픈 현실의 사장님들. 이런 분들은 동지애까지 느껴졌지만, 저는 그 때 알았습니다. 사람이 배고플 때 가장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재료소진으로 주문이 취소되어 어쩔 수 없는 상황임에도 만들어서 자기 앞에 가져오라면 절대 전화를 끝내지 않는 고객, 욕으로 시작으로 욕으로 끝나는 고객, 협박과 조롱으로 무장한 이들....살면서, 지금까지도 이 때 일하며 만난 이들이 최고입니다. 최고의 진상, 최고의 악성...
저는 지금도 배달어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배달음식도 안 먹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며 겪었던 상황과 관련된 이들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욕을 들으며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확실하지 않았다면 전화 받다가 도망갔을 것입니다. 도망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이 때 간절하게, 너무나 간절하게 빨리 아침이 오길 바랬습니다. 그래야 지옥이 끝나니까요. 물론 또 시작될 지옥이었지만, 끝날 순간을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버틸 수 없었습니다. 새벽 4시 30분,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첫 버스를 타고 가던 길이 생각납니다. 대부분은 버스에 앉자마자 잠들었지만, 힘든 고객을 만난 날이며 자괴감에 생각이 많아져 창밖을 봤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로또가 되길, 내 주식이 대박나길.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1년을 했습니다.
퇴사하는 날, 새벽 4시 30분 어김없이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날 울었습니다. 조용히 울었습니다. 기뻐서 울었습니다. 퇴사의 기쁨도 있었지만, 아파트 잔금을 무사히 치루게 되서 울었습니다. 욕~이요라고 할 정도로 최악의 일터였지만, 덕분에 그토록 원하던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퇴사를 앞두고 약 한달간 중도금과 잔금을 치루기 위해 밤잠은 물론, 아침잠도 못잤던 그 때. 저는 그때의 제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지만, 새 아파트, 내 아파트라면 다시 할 저입니다. 충분히 할 저입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텼던 결과와 그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욕~이요 때문에 아파트를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욕~이요를 비롯해, 돈을 벌기 흘렸단 땀과 눈물의 일터에서 버텼던 제가 있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파트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고통와 어려움을 이겨내고 목표를 이루어낸 그 때의 내가 그립기 때문일 것입니다.
밤에 잘 수 있어서 행복하지만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부자는 아니지만, 금전적으로 빈곤하지 않음에도 저는 정신적으로 빈곤합니다. 욕 듣고 번 돈으로 새 아파트에 살 때는 정신적으로 빈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간절히 바랬던 것으로 이루어냈기에 생활 만족도는 물론 자기 만족도도 높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밤에 잠도 잘 수 있는데 왜 불안하고 만족을 못할까요? 그 이유를 몰라 여전히 습관적으로 알바와 구직 사이트를 보며 자신을 갈아넣을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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